
장미와 안개꽃
연우
마쿠요미
흰 방에 다다른다. 요미우리는 문을 열지 못했다. 이 뒤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뒤까지 따라온 모든 것이 그를 떠민다. 요미우리는 반쯤 떠밀려 문의 손잡이를 돌린다. 아무것도 없는 흰 방. 오로지 누군가의 뒷모습이 그를 반긴다.
“…왔어?”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남자, 라고 표현하기도 민망했다. 이 세상에서 그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할 정도의 관계에 놓인 사람이었기에. 보통명사 따위를 차치하고 요미우리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메-. 따스하게 불린 이름은 아니었건만 남자는 그것이 오히려 요미우리답다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곱씹는다. 얼마만에 들은 이름일지.
“응. 니케이.”
이름을 불린 남자는 이름으로 화답한다. 벽지부터 시작해 하지메라 불린 남자가 앉은 의자마저 흰 방에 요미우리는 떠밀려졌다. 누군가에 의해 문은 닫히고, 완벽하게 둘만 남은 공간이 되었다. 어쩌면 산노지보다 더 보기 싫었을 그였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보기 싫었다는 뜻이었다.
“앉아. 어차피 오래 못 있잖아.”
이름이 불린 후의 긴 침묵을 깬 것은 또다시 마쿠노우치였다. 한 사람 정도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곁을 내 준 마쿠노우치의 옆에 요미우리가 앉는다. 앉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방이었다. 둘은 서로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다. 천천히 소리 속에 울음을 섞는 요미우리의 탓일까, 가만히 있는 마쿠노우치의 다리가 천천히 사라져가기 때문일까.
“안 가면 안돼?”
더 이상 흘러가는 시간을 두고볼 수 없었던 요미우리가 어렵사리 입을 뗀다.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큰 모래시계에서 흰 모래가 천천히 떨어지는 것을 더는 보기 싫었던 탓이다. 마쿠노우치는 자신의 오른쪽에 자리한 요미우리의 어깨에 부드럽게 팔을 올려둔다. 이것은, 둘이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이기 전부터 함께했던 버릇이다.
“알잖아.”
“싫어, 있어줘.”
아직은 따스한 그 손길에 요미우리가 울음을 터트린다. 너는 이렇게 자상한데, 너는 이렇게 아직도 따뜻한데 우리는 왜 헤어져야 하는걸까.
“이건 네 꿈일 뿐이야.”
꿈이라고? 그 말에 요미우리가 얼굴을 들어 왼쪽의 마쿠노우치를 본다. 눈물범벅이 된 요미우리의 얼굴을 마쿠노우치가 손으로 닦는다. 그 손길은 너무나도 살아있는 사람의 그것이어서 요미우리는 한 번 더 입술을 앙다문다.
“내 꿈이라고?”
“응. 그러니까 나는, 네가 만들어낸 존재겠지.”
이제는 죽어버린. 뒷말을 씁쓸하게 홀로 내뱉은 마쿠노우치다. 이왕에 꿈이라면 끝나지 않으면 좋으련만. 죽어버린 나도 꿈에서는 살 수 있을 테니까. 죽음과 관련된 생각이 마쿠노우치의 머릿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 생각들에 반응하기라도 한 듯, 홀로 내뱉어 공기중으로 사라져버린 줄만 알았던 그 말에 마쿠노우치의 손에 하나의 꽃다발이 생겨난다. 희고 푸른 알갱이가 줄기로부터 시작해 뻗어나와 잔잔히 박힌 듯한 그런 꽃. 갑자기 생겨난 꽃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마쿠노우치의 얼굴에서 눈길을 뗀 요미우리가 나지막히 속삭인다.
“바보, 이것도 몰라?”
“…안개꽃이잖아.”
“맞아. 죽음이란 뜻이지.”
“그걸 어떻게 잊겠어.”
“그래. 우리가 서로 죽지 말자고 매일 꺾어서 갖다줬던 꽃이니까.”
이건, 네 생각이려나? 누구의 말일지 알 수 없는 대사 하나가 의미없이 생겨났다 스러진다. 마쿠노우치는 괜스레 한 번 더 꽃을 쥐었다 이내 손에 힘을 푼다. 마쿠노우치가 미소를 지으며 따스한 손길로 안개꽃을 요미우리의 심장 부근에 가져다댄다. 요미우리는 주먹을 쥔다. 심장에 자리한 꽃을 보자, 더 이상은 늦출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모래시계의 모래는 반 정도 떨어진 채다.
“마쿠노우치. 들어.”
“뭐라고?”
“듣기만 해. 말하지 마.”
요미우리는 몸을 돌려 마쿠노우치를 본다. 감기 전 눈 안에 마쿠노우치를 담는다. 사랑스러운 눈길, 사랑으로 붉게 물든 두 뺨, 오로지 자신에게만 쏟아지는, 그리고 쏟아질 그런 시선. 모든 것을 눈 안에 간직한 채로 요미우리는 눈을 감는다. 눈을 감은 채로, 그대로 마쿠노우치의 입술에 제 입을 맞춘다. 달려든 입술에 마쿠노우치의 눈이 커졌다 이내 휘어지며 감긴다. 그래. 너는 그랬지. 꽤나 절박하게 저를 조르는 키스를 마쿠노우치는 몇십 초간 받아준다.
“이건, 사랑이야.”
입술을 떼고 숨을 가다듬은 요미우리의 손에는 붉은 장미꽃 한 송이가 생겨나 있다. 이건, 요미우리 네가 만들어낸 꽃이겠지?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눈을 바라보며 마쿠노우치는 요미우리에게 답을 구한다. 사랑이라는 말에 확신이 가득한 얼굴로 요미우리는 엷게 웃는다. 붉은 장미꽃을 가슴에 간직한 채로, 웃는다. 그 모습이 꽃보다도 아름다워 마쿠노우치는 하염없이 눈에 담을 뿐이다.
“그대로 있어.”
안개꽃을 제 가슴에 포개어 둔 마쿠노우치에게 요미우리는 명령한다. 그것이 아무리 짧고 시시하다 해도 요미우리의 말이기에 마쿠노우치는 거스르지 않는다. 요미우리가 가만히 가슴에 안개꽃을 포갠 마쿠노우치의 손을 잡는다. 희고 푸른 안개꽃 위로 장미가 겹쳐진다.
“이건, 사랑의 뜻이고,”
요미우리가 손 안의 꽃을 힘껏 잡는다. 가시에 손이 찔려 적지 않은 피가 흘러내린다. 마쿠노우치는 안절부절하지 못하면서도 요미우리를 바라본다. 한 번 더 양껏 마쿠노우치를 마음 안에 간직한 요미우리가 마쿠노우치를 힘껏 껴안는다. 가슴 사이에서 안개꽃과 붉은 장미가 섞인다. 희고 푸른 꽃 사이의 붉은 빛이 마치 심장을 꺼낸 것만 같았다.
“이건… 널 보낼… 수 없다는, 뜻이고.”
울음이 섞여 말이 드문드문 희어진다. 그런 요미우리를 마쿠노우치는 가만히 껴안는다. 사이의 꽃 가운데 심장소리가 공명한다. 마쿠노우치는 그 소리에 맞추어 요미우리를 부드럽게 안으며 토닥인다. 가시가 파고들어도 아프지 않았다. 안개꽃이 부드럽게 감싸오기 때문일까. 사랑을 감싸안은 죽음이라니. 꼭 우리같네. 쓰게 웃으며 마쿠노우치는 요미우리를 껴안는다. 품 안에서 커져오는 울음소리 사이로 무언가 말이 들려온다. 마쿠노우치는, 그저 듣는다.
“내 꿈이라고 해도, 이게 현실이 아니라고 해도,”
이미 죽은 너를 사랑해버렸다고 해도,
오늘은 널 보낼 수 없어.
안개꽃 "죽음"
붉은 장미 "당신을 사랑합니다"
안개꽃과 붉은 장미
"당신을 보낼 수 없습니다"